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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21 – 예언자가 사라진 교회: 다시, 변방을 위하여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예언자가 사라진 교회: 다시, 변방을 위하여 ‘ 평신도 희년’을 지낸다고 하는 소식을 어디선가 들은 듯싶더니 벌써 반년이나 흘러가 버렸다. 희년은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회당에서 감동적으로 읊은 이사야서의 ‘모든 이들의 해방’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2000년 대희년을 지냈던 한국 천주교회가 평신도 희년을 맞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당시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경갑룡 주교는 ‘한국 교회가 너무 외형적인 발전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복음 정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주교와 사제가 신원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 주교는 결국 문제는 주교들에게 있으며 주교들이 먼저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희년 때 다짐했던 ‘주교들의 깊은 반성과 새로 남’이라는 결의는 20여 년이 흐른 현 시점에서 볼 때 그냥 소비되는 말이었을 뿐, 어떤 구체적 계획과 그에 따른 실천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냥 소비되는 말’. 한국 교계가 평신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어구다. 평신도를 얘기할 때마다 뻔히 말로만 끝날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일이 수십 년 동안 반복되는 현실을 감내해 온 이들이야말로 산상설교에 나오는 복이 있는 이들이 아닌가. 굳은 신앙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상황을 그토록 오래 감내하고 있는 것일까. “사목위원들이 열심히 토론하고 조율해서 의견을 내놓으면 뭐 합니까. 본당 사제가 한마디로 ‘안 된다’고 하면 끝이지요. 평신도는 ‘보조’와 ‘협력’할 뿐이지 함께 의결하지 못한다고 교회법에 나와 있잖아요. 이미 다 아는 얘기인데 이런 걸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사목회장을 지냈다는 70대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말했다. 이어 한 여성 참가자는 “그러면 이런 포럼이나 심포지엄은 왜 하나요? 해 봐야 바뀌는 건 하나 없는데….” 이번 심포지엄 종합토론회 때 많은 이들이 공감의 박수를 보낸 질문이다.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 새천년복음화연구소는 지난 6월 9일에 ‘평신도 희년의 의미와 복음화의 미래’ 주제로 심포지엄을 공동 주최했다. 한 사제는 “한국 교회는 내적으로 자정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내부로부터가 아니라 지금 격변하고 있는 사회의 힘으로 바뀌게 될 것으로 본다. 서구 교회가 그리된 것 아닌가”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교회쇄신을 위해 활동해 온 이들에게는 뼈아픈 말일 수 있다. ‘그동안 뭐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70여 명의 참가자들의 분위기는 사뭇 희망적이었다. 단순한 불만이나 허탈함보다는 밝고 활기차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자리였다. 전쟁 종식과 한반도 평화라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데 대한 기대감과 희망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가 이 자리에서 이심전심으로 나눈 공분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누가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는 ‘교회법이 그렇다고 한다면 신도들이 교회법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하더라도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지도자 아래서 평신도를 보조자로 묶어 놓은 교회법을 바꾸자는 청원운동은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제안들이 나온 자리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간에 이 심포지엄은 교회 내 예언적 목소리가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성찰하게 하는 귀한 자리이기도 했다.   인천성모병원과 대구 희망원 사태를 겪으면서 교회쇄신과 개혁을 외쳐 온 이들은 이렇다 할 소리를 내지 못했다. 거꾸로 시민단체의 성명서를 통해 한국 교회가 어느 지경까지 왔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당황스러운 일들이 수년간 지속되어 옴을 목도하고 있다. 단지 이들의 수가 적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교회 안에서 예언자가 사라지거나 죽어 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인지도 모른다. 대외적으로 정의평화, 평등, 인권 등의 문제에서 목소리를 내 온 교회가 내부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이중적 태도는 이제 습관이 된 듯하다. 그러한 관성에 무감각해진 교회 내 진보진영은 ‘프란치스코 효과’니 ‘충격’이니 말들은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이를 체감하지도 또 제대로 응답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사회교리 주간’을 제정하고 ‘야전병원’이라는 새로운 교회 모델을 언급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그만큼 교회 내 진보진영의 목소리는 ‘연성화’되었다. 주교 선출, 공동의 의사결정 구조 확립, 주요 자리에 평신도 등용 같은 기초적인 교회의 합리화에 침묵하거나 ‘다양성’의 이름으로 오히려 위계를 변호하는 듯이 보인다. 지도력 결핍과 부패로 온갖 악취가 풍겨도, 전례문이 개악되어 신자들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어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탈중앙집중화나 탈로마화라는 ‘중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를 통해 권력을 지역교회로 이전하려는 숭고한 뜻은 한국과 아시아 교회의 지형에서는 지역교회의 권력을 성직자들이 독점함으로써 성직중심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 중심부로 진보적 평신도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합류하게 됨으로써 중심과 변방의 간극은 더 심화된다. 언젠가 마오쩌둥은 ‘진정한 사랑은 계급을 초월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이 주제는 TV 방송사들이 막장 드라마에 매일처럼 등장시키는 단골 메뉴다. 계급을 초월한 사랑이 불가능함을 어떻게 더 막장적으로 보여 줄까를 놓고 경쟁하지만 역으로 그것이 현실임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리얼하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중심부가 아니라 변방에 위치시키지 않고, 더 변방에 있는 이들의 눈물과 고통을 어루만지지 못한다면 마오쩌둥의 말을 넘어서기 어렵다. ‘갈릴래아에서 뭐 신통한 게 나오겠냐’는 성서 구절처럼, 온갖 굴욕과 모멸을 바닥깔개처럼 감내해야 하는 이 시대의 변방은, 거기서 울리는 예언자의 목소리는 가난한 예수의 것이며 우리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트럼프와 김정은 두 정상이 ‘세기의 회담’을 열고 이루어 낸 결과에서 보이듯 분명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교회의 변화가 이러한 외적 요인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변화를 교회 내부에서 수용하고 변용하여 발전적 방향으로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교회적 상상력과 경험, 전문성과 비전 등 주체적인 평신도의 역량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는 너무 멀리 나가 버린 교회를 되돌리겠다거나 수리해서 다시 잘 작동하게 하여 지난날의 명성을 되찾자는 ‘기능론적’ 또는 ‘승리주의적’ 관점과 구분되어야 한다. 작은 문제 하나하나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평신도들이 이러한 변화를 이끌 수 있으며 진정한 교회개혁의 실현을 준비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그동안 ‘교회문화 바꾸기’라는 제목 아래 교회쇄신과 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 독자와 나누고자 했다. 어설프고 설익은 글을 읽어 준 독자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음 달부터는 조금 더 다양하고 넓은 시각과 자유로운 주제로 찾아갈 것을 약속하면서 인사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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