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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정답은 예수~

황경훈(아시아평화연대센터장)

정답은 예수~

몇 해 전에 머나먼 아프리카하고도 남수단의 조그만 마을 ‘톤즈’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고 이태석 신부가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포함해 많은 신자들이 아직도 ‘감동’으로 또는 ‘아픔’과 ‘눈물’로 기억하고 있을 듯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불살라 내전으로 피폐된 톤즈 주민들의 삶에 새살을 돋게 하였던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48살이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등지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던 그 안타까운 드라마가 큰 울림을 주는 것이었기에 그러했습니다.

또한 그의 삶을 TV뿐 아니라 그것을 각색해 만든 영화 ‘울지마 톤즈’가 상영되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으로 인터넷을 통해 수백만명이 시청했다니, 가히 ‘이태석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여는 대목에서 좀 길게 이태석 신부를 소개한 것은 오늘 이야기가 이분의 삶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는 ‘선교’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뿐 아니라 아시아에도 오지가 많고 그곳에 사는 토착민도 많습니다.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아시아의 한 오지에 파견된 선교사가 문화가 다른 토착민들과 살면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해야 하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용입니다. ‘진정한 선교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화두로 던지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인도네시아 동쪽 이리안자야의 무유 부족은 검소하고 끈질기며, 한편으로는 미신적이고 또 고집이 세다. 내 친구인 한 가톨릭 사제가 이들에게 선교 활동을 하면서 겪은 곤란했던 일을 털어 놓았다.

“우리가 말이지, 지구의 반을 돌아서 하느님을 알리러 이 무유족에게 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말야. 온 마을 남녀노소를 교회 안으로 몰아넣고 하느님의 가장 신성한 신비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말이지. 웅성거리고 있는 이들에게 스피커를 사용해서 우리의 이 메시지를 퍼지게 하기 위해 여러 말들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거지. 더 크게 말할수록 더 잘 알아듣는 듯했지.

이런 내 행동들을 무유족은 어떻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사실 이런 행동들은 이들이 신성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나 그 방식을 정면 공격한 거나 다름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만. 왜냐면 무유족에게 가장 성스러운 신비는 늘 직접 귀엣말로 속삭임을 통해서 전해져야 하는 것이었거든. 이들에게 신비는 어떤 질서를 이루며 드러나게 되지. 이를테면 그 신비적 실재의 심오함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한에서 먼저 어른부터 청년들에게 드러나게 된다는 거야. 그렇다고 모든 게 그런 식은 아니고, 혹 가다가 모두가 좋아할 만한 메시지라면 남녀노소 앞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곤 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신성한 것을 얘기한다는 것은 무례한 행위로 간주되고, 그럼에도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내용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는 거지.”

내 친구 선교사가 이렇게 성찰하고 ‘선교’와 관련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은데, 과제는 여전히 남는 것 같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리기 위한 가장 최선의 길은 무엇이고, 이 말씀 스스로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수많은 다양한 문화의 풍요로움 안에서 그것을 조금도 상실함 없이 하느님 말씀이 들리도록 하는 그러한 길 말이다.

실화. 빈스 콜리 신부, 메리놀회. 파푸아 뉴기니, 인도네시아.

(출처: Once Upon a Time in Asia: Stories of Harmony and Peace, ed. by James Kroeger (Claretian Publication, 2006).

빈스 신부의 친구인 이 선교사의 성찰은 선교행위에서 ‘지역 문화를 우선적으로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전에 해오던 선교방식을 고수할 것인가’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자기반성은 매우 값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면 아무리 자신의 진리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니라 ‘소음’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무유족에게 돌리면, 하느님의 신비는 귀엣말로 조심스럽게 속삭임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지, 스피커를 통해 공개적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식은 아니며, 이를 계속했을 때 이들에게는 ‘정면 공격하는 것’이고 모욕을 주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이쯤 되면 선교의 방식을 바꿀 것인가를 본격 고민해야 하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니, 선교에 있어 무척 중요한 결정을 불러오는 자기반성이요, 깊은 기도 속에서 나오는 성찰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고민 앞에서 빈스 신부의 태도는 묘합니다. 그 선교사 친구의 말에 동의하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공개적인 말씀 선포나 전달이 아닌, 무유족의 방식대로 아주 개인적으로 만나 가만 가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말하는 방식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그게 다가 아니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어려워 보이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무유족을 비롯해 아시아의, 아니 전 지구상의 모든 민족의 풍요로운 문화의 영적 자산을 상실함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리는 최선의 길이 어떤 것인지, 또 그 말씀이 강요나 어거지가 아니라 그 다양한 문화 안에서 ‘스스로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묻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질문자체가 어렵고 추상적이므로, 얘기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화가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해서 이렇게 정리를 해보도록 하지요. 공개적으로 하든 귀엣말로 하든 말씀을 선포한다는 점에서는 ‘직접적인 선교’ 방식이라고 볼 수 있고, 문화 안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말씀의 직접적인 선포보다는 삶의 구석 구석, 마디 마디에서, 마치 익숙한 밥짓는 냄새처럼, 낡았지만 몸에 잘 맞는 옷처럼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니 ‘삶을 통한 현존이요 증거’라고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개종’이라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놓고 본다면 직접적인 말씀 선포가 그 목적을 이루기에는 더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반면 선교사 스스로 자신이 선교사라고 밝힘이 없이도 존재함 자체로, 또 선행의 삶을 통해 자신의 종교를 증거함으로써 개종을 시키기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한번 헤아려 본다면, 이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지요. 파키스탄이나 인도, 방글라데시 등의 남아시아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인도차이나 국가들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사’가 아닌 구호단체나 NGO로 등록하고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서 직접 선포는 지극히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삶으로 보여주면서 이웃들이 자신에게 감화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요. 이것이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의 현실이라면 선교는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이런 문제에 부딪쳤을 때 선교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과연 예수님은 개종을 원하시고 살아생전 그런 모습을 보이셨는가?’하는 물음을 가지고 말이지요.

오늘 이야기를 이태석 신부로 시작했으니 선교사였던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를 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다음에서 나오는 글과 인용문은 그가 남긴 한권의 책 『친구가 되어주실래요?』(생활성서, 2012)에 나오는 이태석 자신의 말입니다.

이태석 신부는 인종학살로 유명했던 다르푸르의 이슬람 아이들을 자신이 있는 지역으로 데려오고 거기서 아이들과 만나면서, ‘인종청소’를 피해 죽음의 늪에서 겨우 빠져나온 아이들에게 “가톨릭이니 개신교니 이슬람교니 하며 사람을 종교로 구분 짓는 것이 그들에겐 배부른 소리요 조금은 미안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슬람 지역에서 그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없다고 하여 선교 기능이 정말 마비된 것인가를 스스로 물으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추체험에 들어가서 고민 끝에 답을 찾아 나옵니다. 곧 “[예수님은] 그들을 개종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을 안아 주며 위로해 주실 것”이며, “[개종의] 결과나 수치, 틀에 박히지 않는 예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교”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을 선교활동하시는 분들이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제안하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는 선교란 이태석 신부를 비롯해 타국의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도 해당되지만, 본당이나 교구차원에서 이런저런 선교 활동을 하는 분들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과연 우리는 ‘개종을 포기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지면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귀뚜라미 소리가 구성지게 깊어가는 가을, 9월에 만나길 바라며 인사를 대신합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