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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도둑의 회심

황경훈(아시아평화연대센터장)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복잡한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옛것과 새것을 공부하는데 열정을 쏟고 있다. 우리신학연구소 창립 때부터 현재까지 평신도 신학을 생각하며, 아시아 NGO 청년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며 살고자 애쓴다.

이번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부활호가 나갈 즈음이면 이미 부활절은 지나 있을 터이지만, 그 분위기가 아주 사라질 정도로 멀지 않은 시점에 나오리라 기대하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때가 때인지라 얼마 전 한 모임에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부활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체험이 아니라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활발하게 얘기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연과학의 법칙 중에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형태가 바뀌어도 없어지지 않고 보존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니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거나 미생물의 먹이가 되거나, 풀잎으로 태어나도 사라지지 않으니 그게 부활이고 영원한 삶이지. 나는 부활을 그렇게 봐.”

‘과학’을 앞세워 얘기해서인지 모인 사람들 중 여럿이 공감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체험하지 않았으니,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요. 다만, ‘죽음처럼 암흑 같던 과거에서 회개해 부활했다’는 말처럼 비유적으로 쓴다면 좀 쉬워질 것도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마치 사도 바오로가 겪었던 극적 회심이나 그 정도가 아니라도 크고 작은 회개 뒤에 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부활절 앞에 40일 동안 있는 사순절도 어떻게 보면, ‘큰 반성’을 위해 회개하는 기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번호 주제는 회개이니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고 회개 혹은 회심 얘기를 더 나누어 보도록 하지요.

도둑의 회심

1980년대 말 상하이에 도둑질로 먹고 사는 교활하기로 악명이 높은 리산이라는 도둑이 살았다. 그는 도둑질하는 데 특출난 능력과 솜씨가 있었고 한 번도 잡힌 적도 없었으며, 자기가 맘먹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훔칠 수 있노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어느 날 거리를 배회하면서 뭘 훔칠까 궁리하고 있는데 그의 친구인 왕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야, 대박 뉴스가 있어. 어떤 집이 방금 수 백 만원을 탔는데, 그 집에는 늙은 부부만 살고 있고, 더 중요한 건 내가 그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는 거야!”

“그래! 오늘밤 내가 털지.” 리산은 쾌재를 부르며 자신만만한 웃음을 흘렸다.

“근데 말이야, 그 집에는 엄청 크고 사나운 늑대개가 있어서 조심해야 할 걸.”

“그게 어쨌다고. 그냥 멍청한 개야. 너 지금 내 실력 의심하는 거냐?” 리산은 자신만만해 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리산은 도구를 챙기고 곧바로 늙은 부부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 집 정문 위에 커다란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를 살핀 뒤 숨죽이며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개가 짖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목줄을 끊고 달려들 듯 세차게 짖어대는 커다란 개를 보자마자 리산은 독 묻은 고기 덩어리를 개 앞으로 휙 던졌다. 조금 지나자 개는 땅에 나뒹굴었다. 리산은 소리 없이 정문을 밀고 들어가 현관문을 연 다음 재빨리 침실로 가서 베개 밑에 있는 돈을 찾아냈다. ‘되게 쉽네,’ 리산은 생각했다. ‘돈이 이렇게 많은데 금고도 없네. 그 정도 돈도 쓰기가 아까운 모양인가?’

그 때 옆방에서 두런두런 늙은 부부가 얘기하는 소리가 나자 숨죽이며 그 자리에 죽은 듯 멈춰서 부부가 자신이 들어온 것을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할아범, 돈이 좀 들더라도 우리를 돌봐줄 식모라도 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 둘 다 늙고 앞도 못 보는 장님인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려고 그러우?” 힘이 다 빠진 듯한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산은 놀랐다. 만약 이들이 장님이라면, 왜 정문 앞에 커다란 등을 달아 놨는지 순간 이해가 안 갔다.

“그건 그렇지, 할멈 말이 맞지. 근데 돈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식모를 구하든 말든 하지.” 마치 리산이 듣고 있는 걸 안다는 듯 남편이 말을 받았다.

“사고로 죽은 우리 아들애 보상금조로 얼마 전에 받은 몇 백만 원이 있잖아요. 그걸 쓰면 안 될까?”

“이 할멈 미쳤구먼. 그 돈은 고아원 세우는데 기부하기로 했잖아. 기억 안나?”

리산은 부부의 얘기를 들으며 점점 양심이 찔려 옴을 어쩌지 못했다.

“아참, 그러기로 했지. 내 정신 좀 봐. 그것도 까먹다니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그럼 돈 드니까 등불용 기름도 사지 말고, 또 우리 개 딩딩을 팔아서 돈을 좀 모으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등불은 꼭 필요해. 길가에 등불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밤에 다니는 사람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또 딩딩이 여기 있는 걸 사람들이 아니까 강도나 도둑을 겁내지 않고 이 길로 지나다니는 거라고.”

“그건 그래. 할아범 말이 맞네. 우리가 젊었을 때 아들 하나를 더 가졌어야 했는데 말이야.” 늙은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계속 해요. 붙여야 할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리산은 소리 없이 집을 나와 정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고아였던 리산은 양아버지의 폭력과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집에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늙은 부부 집 현관 앞에는 돈과 견고하게 만든 금고가 놓여 있었다.

그 날 이후 아무도 리산을 보지 못했다. 그는 마치 작은 구름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리산이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하기도 하고, 중이 됐을 거라고 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리산이 자선사업가가 됐을 거라고도 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일이 있은 지 몇 년 뒤, 리산의 이름으로 몇 개의 고아원과 양로원이 세워졌다.

조셉 장, 예수회, 마닐라, 필리핀.

(출처: Once Upon a Time in Asia: Stories of Harmony and Peace, ed. by James Kroeger (Claretian Publication, 2006).

요즘 TV 드라마 많이들 보시는 듯한데, 이 얘기도 한편의 짧은 드라마 같네요. 두 늙은 노인네가 희뿌연 호롱불을 벗 삼아 두런거리며 종이박스를 붙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고, 리산이 독을 묻혀 잠재운 딩딩이라는 개가 안됐다는 생각도 들고, 불쌍한 두 노인네만 남기고 아들이 너무 일찍 죽어 마음도 짠해오고……. 그런데 무엇보다도 리산은 그 일이 있은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중이나 수도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자선사업가가 되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이 얘기를 그리스도교 버전으로 정리해보면, 하느님이 영을 보내시어 리산으로 하여금 그 집으로 가게 하여 노부부의 말을 듣게 됐고, 그리하여 리산은 과거 자신이 집을 떠나야 했던 아픔을 떠올리게 되고 그게 노부부의 누추하나 아름다운 삶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면서, 말 그대로 회심을 하여 그동안 도둑질해 모은 돈을 그 집 앞에 떨어뜨리고 구름처럼 표연히 사라져 버린 거지요. 리산은 그렇게 부활한 것이지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 했으니 리산은 아직도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겠지요?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해서인지 얼굴도 모르지만 ‘리산’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렸을 적 그가 겪은 아픔과 마침내 내린 그 결심과, 또 노부부의 착한 삶이 마치 실제 제게 일어난 것처럼 선명하게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혹시 기억하는 사람과 그 대상 사이에서,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어떤 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드네요. 독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유교에서는 죽어서 간다는 천당이나 지옥 같은 내세 관념이 없고 또 영혼의 존재도 믿지 않지만 (그래서 유교가 종교니 아니니 말들이 많지만), 혼백(魂魄)이라 하여 사후에 음양의 법칙에 따라 음기운인 혼은 양의 기운으로 가득한 하늘로 올라가고 양기를 띠는 몸인 백은 대지로 돌아가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합니다. 혼백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 완전히 소멸하는 데에 이르는 시간을 3년으로 어림잡기 때문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으로 치르는 이유가 이런 데에 연유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소멸이 아니라 ‘영원’의 개념이 있으니, 어떠한 형태로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게 내세관이고, 오늘 우리의 주제로 말할라치면 부활이 된다고도 하겠습니다.

이쯤해서 이야기를 끝내도 되겠지만, 조금 더 할 말이 남은 듯도 합니다. 제가 독자님들에게 한 번 더 생각해보자고 권하고 싶은 건 오늘 이야기 주제인 회심인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회심을 좀 더 파고들어 보자는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을 수없이 죽이고 박해한 바오로가 극적으로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을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가장 전교를 열심히 한 열성 제자가 된 것이나, 그에 비할 건 아니지만 리산의 회심도 ‘자기 죄 또는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섬’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회심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리산의 경우를 찬찬히 다시 보면, 노부부의 말을 듣고 자신의 과거를 떠 올리고 그런 자신에 대한 연민이 노부부에게로 이어지게 되지요. 바로 이 대목, 여기서 잠깐 화면을 중지하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니까 리산이 회심했다고 한마디로 말하더라도 그 안에는 여러 마디가 있는데, 이를테면 자신에 대한 연민이 노부부의 선한 삶과 오버랩 되면서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지요. 따라서 여기서 회심은 리산의 자각, 다른 말로 ‘깨침’과 ‘결심’이 포함되었다는 말이 된다는 거지요.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쯤 되는 사람이 큰일을 이룬 뒤에 그것을 하게 된 동기를 ‘~에 크게 깨닫고’라거나 ‘뜻한 바 있어서’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이야기 주인공인 리산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고 보이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그런 깨침이나 자각은 회심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다시 그리스도교 버전으로 풀어보면,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소명, 곧 우리를 부르고 계신 그 자체를 깨닫는 것, 나아가 그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하느님으로 완전히 돌아서는 회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덕목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이 부르시고 계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구원이라는 것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사에서 얻게 되는 크고 작은 깨달음이 곧 구원이 아닐까, 조금 더 생각을 밀고 나가면, 따라서 하느님의 구원은 한방에 직구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간단없는 크고 작은 깨달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깨침이 반드시 ‘죄’에 대한 회심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기에 깨달음 자체가 구원의 차원을 지니는 것은 아닌가, 자꾸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내친김에 한발 더 나아가면, 하느님의 계시를 믿는 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임에 틀림이 없고 성서의 말씀을 통해 그 계시가 드러남이 분명하지만, 성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일상으로 확대되어 그 안에 늘 함께 하는 것이라면, ‘이미 와 있는’ 그 계시를 ‘발견’해내는 지혜야말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갖춰야할 마땅한 덕목이 아닐까, 물음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리산처럼 회심의 과정을 겪은 이들은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의 계시를 순간순간 더 잘 깨닫고 손에 쥔 참새처럼 더 분명하고 생생하게 찾아낼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같이 발견해내는 지혜와 그것을 믿는 신앙은 둘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 아닌가, 이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어쩌지 못하는 밀물처럼 압도해 옵니다. 이런 말에 공감이 가시는 분들은 아마도 전통적으로 그리스교를 ‘신앙의 종교’라고 한 데 대해, 어쩌면 ‘깨달음의 종교’이기도 하지 않을까라고 말씀드려도 공감하지 않을까 짐작만 해봅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멀리가고 있는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지만, 신앙인이라면 한번쯤은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독자님들의 동행을 청해 보는 것이지요.

독자님들의 밝은 눈과 귀를 믿으며, 올해는 더욱 더 붉을 것만 같은 철쭉이 피는 5월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