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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 권위주의적 구조와 소통 1 : ‘대화’와 ‘합의’의 부활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물론 희망을 말한 것이지 현재 교회에서 대화, 소통, 합의라는 말이 온전한 의미대로 실현되거나 되살아났다는 뜻은 아니다. ‘죽음보다 강한 희망’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버릴 수 없는 덕목이니 언젠가는 실현되리라고 꿈꾸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부활’이라고 하면 이미 죽음을 전제하는데,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서 이런 민주적 요소인 대화와 합의는 언제 죽었다는 말인가. 굳이 시점을 잡아 본다면 아마도 한국 교회에서는 초기 새 세상을 대망하며 천진암에 모여 강학회를 열고, 열심히 배우고 믿으면서 그것을 전하려 애썼던 초기교회 60여 년 바로 그 뒤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천주교회에서 대화와 합의의 정신은 조선시대 봉건질서 속에서 ‘평등을 꿈꾸는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초기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고 이들이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나누어 놓았다고 보면 그 생명이 길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아니 그래도 우리에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있지 않은가. 공의회의 대표적 정신이 세상과의 소통과 대화였으니 그것의 부활은 공의회를 시점으로 잡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얼마나 공의회가 이 ‘대화’의 정신에 충실했는지 문서를 뒤적이는 일은 일단 접자. 다만 한 가지, 지역주교단의 권한과 협력을 강조하는 ‘단체성’(collegiality)을 크게 부각하여 바티칸의 중세적 중앙집권적 모습을 탈피하고 지역 교회에 자율성을 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개혁적, 예언자적 행위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단체성이 햇빛을 보기 위해서는 교황 바오로 6세 이후 먼지에 파묻힌 채 40여 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아시아의 경우, 공의회의 대화 정신에 힘입어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 불교, 유교, 힌두교 등 대 종교 전통과의 대화, 또 다양하다는 말조차도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다원적인 문화와의 대화라는 ‘삼중 대화’를 정식화하는 데에 영감을 주었고, 나아가 ‘참여 교회’라는 교회론으로 또 ‘소공동체 운동’이라는 사목적 실천으로 구체화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시아 교회의 삼중대화와 소공동체에 있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역교회가 아니라 여전히 상명하달의 수직적 관계가 그대로인 채, 대화와 합리성이 실종된 성직자 중심의 교계라는 점은 그러나 성령은 정녕 불고 싶은 대로 부는가 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처음부터 탈중앙집권화, 분권화를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하며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다. 최근에는 전례에 쓰이는 문서를 라틴어에서 현지 언어로 옮기는 문제와 관련해 책임의 대부분을 교황청에서 각 나라 주교회의에 넘긴다는 자의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9월 9일 ‘큰 원칙’이라는 자의교서에서 “전례가 사람들에게 더욱 잘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요청이 더욱 명확히 재확인되고 실천되도록 교회법을 바꾼다”(<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2017.9.11.)고 밝혔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교회법 838조 2항에서 교황청이 전례서의 각국 번역판을 감독해 인준한다는 내용과 3항에서 각국 주교회의는 교황청의 사전인준을 받고 출판하라는 내용의 두 조항을 ‘각 지역 주교회의가 승인한 라틴어 전례문의 번역판을 교황청이 인준한다’라고 간략히 바꾼 것이다. 그러니까 각국 주교회의에서 번역상의 문제가 없다고 ‘오케이’하면 바티칸에서는 다른 까다로운 절차 없이 승인하겠다는 뜻으로, 그 책임을 각국 주교회의, 곧 지역교회에 넘겼음을 뜻하는 것이다. 2001년 개악된 이후 15년여의 혼란과 갈등이 있고 난 다음이어서 더욱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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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은 전례서의 번역 책임을 각국 주교회의 곧 지역교회에 넘겼다.

2001년 경신성사성은 훈령을 내고 라틴어 번역은 “그 내용을 하나도 빠트리거나 더함이 없이, 가장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성, 속을 엄격히 나누고 거룩함을 라틴어에서만 찾는 성직자나 신학자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1969년 공의회 정신이 서슬퍼렇게 살아 있을 때 경신성사성이 라틴어 번역을 각 나라의 언어와 문화 여건에 맞게 번역하도록 권고한 번역지침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공의회 정신에 어굿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 경신성사성은 교황청이 인준권한이 있지만 주요 책임은 지역 교회에 있음을 확인해 준 것으로, 2001년 훈령은 그 방향을 거꾸로 되돌린 과거로의 회귀였기 때문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에둘러 지적한 것처럼, 이 2001년 훈령은 아무리 원본에 가까운 번역이라 하더라도 소수의 신학자, 소수의 사제, 소수의 성직자를 위한 것만으로 여기에 ‘하느님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에 대한 배려나 이들의 신앙감각은 들어설 틈이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례요 신학이란 말인가.

두 가지만 말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법에 지나치게 기대지 말라며 자비로운 교회상을 강조해 왔다. 평소 신념대로 프란치스코는 교회법을 뜯어고쳤다. (교회)법은 소수 성직자나 신학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 줬다. 교회법을 바꾼 것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을 향한 것임을 교계 지도자들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둘째는 이번 교회법 수정은 지역교회의 권한의 확대라는 분권화를 상징한다는 점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도널드 트로트만 주교는 “이번 교회법 개정은 지역교회 주교단의 단체성의 승리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의 승리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미국에는 2001년 훈령에 따라 2011년에 미사경본을 수정함으로써 이미 수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었기 때문에 또 다시 미사경본을 바꾸기에는 예상되는 혼란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잃은 길을 되찾았으니 좀 쉬었다가 가는, 이를테면 시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어떠한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어긋나는 2001년 훈령에 따라 바꾼 미사경본을 (이번 대림 제1주일부터) 쓴다고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법이 바뀌었으니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겠다. 하나는 차제에 ‘하느님의 백성’과의 어떤 대화나 소통 없이, 공청회 한 번 열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소수의 성직자, 소수의 신학자’들이 모여 결정한 ‘절차의 문제’를 반성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의견이 반영되어 이들의 신앙감각이 표현되고 성장하는 방향을 모색하는 전향적인 태도다. 다른 하나는 이번 교황의 교회법 개정을 지역교회 전체가 아니라 ‘주교 권한의 확대’로만 좁혀 해석해 ‘아무 문제없다’고 보는 시각일 것이다. 후자는 매우 우려스럽다. 이 문제는 미사 경본을 바꾼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저토록 곡진한 교황의 교회개혁의 구체적 실행이, 탈중앙집권화가, 한국교회에서는 개혁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와 성직주의가 고착화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