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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 전례와 언어 2 : 사제는 그리스도인가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우연의 일치일까. 지난번 칼럼에서 1997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주님의 기도’가 신자들의 ‘신앙 감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바뀌었다고 지적했는데, 정확하게 20년 뒤인 2017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새 미사경본’을 내놓았다니, 시점이 매우 절묘하다. 20년 전의 과거가 현재가 되는 시간의 역전을 다시 한번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로감부터 느끼기에는 아직 이르다. 신앙의 세계에서, ‘하느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 년이요 그 반대도 가능하겠지만 제도로서 한국 천주교회가 결정한 두 사안은 매우 인간적인 것이기에, 그 시간이 주는 의미를 성찰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인간들의 공동체이기도 한 교회의 신앙을 위해서도 의미가 있겠다. 다시 평신도의 힘을 내 본다.

주교회의는 지난 3월 21-24일 춘계 주교회의에서 올해 대림 1주부터 ‘몇 가지’가 수정된 새 미사경본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새 미사경본에 대한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추인이 지난 2월 21일이었다니 ‘20년 만의 또 다른 개정’에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 작용했음이 틀림이 없다. 다시 환기컨대, 문제는 이 시간이 얼마나 ‘하느님의 백성’이 성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에 대한 해석이요 판단이겠다. 주교회의에 따르면, “미사경본 내용 전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번역상 표현이 바뀌는 것”(<가톨릭 신문> 2017년 4월 2일)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바뀐 부분은 미사 때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면, 신자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가 아니라 앞으로는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해야 하는 대목이다. 이에 버금가게 중요하다고 보이는 부분은 성찬의 전례 때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에서 ‘모든 이’가 ‘많은 이’로 바뀐 대목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면 달리 왜 그래야 하는지를 잘 모를 표현상의 ‘작은’ 차이인 듯 보인다. 어쨌든 내친김에 바뀐 부분을 좀 더 말해 보면, 거양성체 때 사제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고 한 데에 “보라”를 앞에 덧붙여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한다. 또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복된 사도들과” 사이에 “배필이신 성 요셉과”라는 부분의 삽입 등이다.

아직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는 이 ‘작은’ 변화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별 얘기가 없는 듯하다. 발표한 지 한 달 남짓 지나지 않았고 또 실제로 쓰이는 대림까지는 여러 달이 남아 있기도 하니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미 미국교회에서는 2011년에 개정된 미사경본의 이 ‘작은’ 변화 때문에 매우 큰 혼란을 겪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반면교사로서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크게 보자면 ‘전통으로의 회귀’라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원대한’ 프로젝트 아래에서 이뤄진 변화의 하나로 그 ‘여진’은 결코 미미한 것이 아니었다. 40년 만에 개정된 것이어서 한 세대 넘게 쓰여 왔기 때문에 몸에 배일 대로 배여서 변화가 매우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닌 것 같다. 미사 중 5번이나 나오는 ‘또한 사제와 함께’를 “왜 굳이 라틴어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온당한 불만이나, 보통 한국어 미사에서 ‘잔’으로 표현되는 cup을 성작인 chalice라는 교회의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어려운 용어를 써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연합뉴스> 2011년 11월 28일)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 전역의 사제를 대상으로 실시한 표본 조사에 따르면, 주례 사제 가운데 59퍼센트가 ‘고전적’ 형태로 바뀐 미사 형식에 대해 여전히 동의하지 않으며, 76퍼센트는 ‘미사에 쓰이는 용어가 이상해서 분심이 든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그 혼란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Huff Post> April 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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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대림 1주부터 쓸 새 미사경본은 거양성체 때 “또한 사제와 함께”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로 수정되었다. (이미지 출처 = UJB_catholic가 유튜브에 게시한 동영상 갈무리)

다시 한국 천주교회로 돌아와, 이번 변경과 관련해 ‘라틴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 한다’는 설명을 듣고 있자니 좀 혼란스럽다. 뭔가 석연치 않고 작위적인 느낌마저 드는데, 그도 그럴 것이 라틴어 원문 “Et cum spiritu tuo”을 직역한다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가 아니라 “또한 당신(tuo)의 영과 함께”로 해야 맞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을 ‘사제의 영’으로 의역한 셈이다. 지난 칼럼에서 ‘주님의 기도’를 다루면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도문의 ‘아버지’를 ‘하느님’이나 ‘당신’으로 번역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서도 당신이나 그리스도로 번역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사제’는 그대로 두고 ‘영’만을 더 가져다가 덧붙였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 매우 위태로운 경계가 자리한다.

신학적으로 말해 미사는 그리스도의 영의 현존 안에서 그리스도가 주례하는 것이므로, 내용상 올바른 번역은 ‘그리스도 영이 당신(주례자) 안에서 현존하고 활동함을 믿는 것과 함께’로 옮겨야 한다. 그런데 ‘사제의 영과 함께’로 응답하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미사를 하면서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인지 사제의 영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신학적 혼돈이 사목적 왜곡을 낳는 순간의 크로키다. 이런 종류의 혼돈이 예상됨에도 굳이 바꾸고자 하는 그 이데올로기적 의도에 대해 아직 묻지 않겠다. 그 개정 과정에 평신도 신학자들이 참석했는지, 평신도의 신앙의 성숙을 고려한 판단이었는지도 묻지 않겠다. 평신도 신학자들, 특히 여성신학계에서 이것에 대한 반응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순서일 것 같아서다. 그러한 혼돈에 국한해 말한다면 여성들이 왜 굳이 ‘몸’과 ‘영’을 나누어 영만을 말하는가라고 물을 것 같기 때문이다. 곧 성찬례인 미사 안에서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면, 빵과 포도주에 임하듯 그 제사의 주례자인 사제의 몸과 마음에 은총으로 현존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를 표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두’에서 ‘많이’로의 변경은 신학적 혼돈이 사목적 왜곡을 넘어 ‘재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인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희생이 ‘모든 이’가 아니라 ‘많은’ 이에 국한된다면, 누군가는 그 ‘많은’ 이에 포함되지 못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목적 재난’인 이유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타종교인, 비종교인에 대해 활짝 연 문을 다시 닫아 버리는 과거로의 회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교회’라는 오명은 단지 성직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신학적이고 사목적인 반동이 난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아니 그것을 넘어 그러한 반동성을 재생산하는 거대한 관료구조가 거의 빈틈없이 자리 잡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도, 교황 프란치스코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교회개혁 의지도 조금이라도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평신도의 신앙감각이나 ‘공동합의성’은 언감생신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