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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아시아에 진정한 관심을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마스(Masue, 49)는 타이로 밀려 들어온 다른 미얀마 이주민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보름 동안 세 번, 한 달이면 여섯 번 밀물 썰물이 집 안으로 쳐들어올 정도로 해수면과 붙어 있다시피 한 집에서 살지만 살림 형편은 다른 난민들보다 나아 보였다. 남편의 부친이 미얀마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정당에 연루되어 받아온 정치적 억압 때문에 미얀마를 떠나 말레이시아에서 몇 년을 보내고 고국이 건너다 보이는 타이 남단 라농 지역 육지 끝자락에 보금자리를 튼 지도 24년이 지났다. 그 사이 미얀마에 남겨 둔 두 딸은 장성해서 첫째는 교사가 되었고 둘째는 대학에 다닌다. 최근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 미얀마에 가서 두 딸과 이들을 길러 준 친언니를 만나고 왔다. 두 딸의 양육비와 언니의 생활비를 벌어 달마다 보내 주는 대신 마스 자신은 이모로 살기로 언니와 굳게 약속하고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켜온 터다. 두 딸은 언니를 엄마라고 알고 있고 자신을 이모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다가도, 한편 서운함이 깊었다. 그래도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자녀도 장성한 마당이니 이제 자신이 친어머니임을 밝히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았다. 하지만 마스는 끝까지 이모로 남기로 했다고 말하고는, 끝내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정치권력이 군부에서 민간으로 이양되었다고는 하지만 군부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마스 부부가 두 딸의 친부모로 밝혀지면 이들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부모자식 간이 영영 남남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과연 마스가 겪어 왔고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의 이 지극히 고단한 삶은 도대체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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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 끝자락에 있는 집

방으로 들이닥치는 바닷물 때문에 몇 시간을 기다려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가족을 끔찍이도 아끼는 아시아인의 정서를 생각할 때 마스의 결정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스와 같은 처지는 매우 기구하고 애끓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얀마에서 온 300만 명의 이주민 또는 난민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가. 그것도 단기 비자를 받은 이들이 그러하고 여기에 ‘불법체류자’를 포함한다면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불법체류자가 아닌 마스보다도 더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은 확인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인다. 타이 국민들, 특히 타이 노동자들의 반응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이들을 ‘일터를 빼앗는’ 자신들의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본다. 더럽고 위험한 온갖 궂은 일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처지에서 할 말이 없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자본가들과 그에 기생하는 정권에게는 더 없는 경제적 이득의 원천이고 이를 통해 자국의 노동자들도 손쉽게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으니 이들의 존재야말로 더 없이 요긴하다. 그리하여 자국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과 증오와 폭력은 어쩌면 이들의 짜 놓은 판에서 벌이는 처절한 ‘서바이벌 게임’인지도 모른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주노동자, 난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의 존재나 억울한 사정이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스의 가족도 그러하고 그 다음에 방문해 하루 밤낮을 같이 보낸 천연 고무나무 농장 노동자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고무나무 2000그루면 분명 부자이지만 소유주는 물론 타이 사람이고 더욱이 생산물의 40퍼센트만을 임금으로 받고 있어서 그야말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신세를 10년째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난민은 ‘위험’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사람’“이라는 교황의 말은 난민, 이주민이 어떤 처지에 있고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이들의 삶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이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타이 사람들보다 많은 수가 살고 있는 미얀마 난민, 이주민의 삶을 단 하루라도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이들의 사연과 한과 고통을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한국인들이 난민과 이주민을 주제로 열리고 있는 이번 ‘아시아 청년아카데미/실천신학 포럼’에 참가하도록 이리저리 노력했지만 적극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여전히 아시아는 한국과 한국교회에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정서에서도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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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 끝자락에 있는 집

한국 교회와 교계 언론에서는 교회가 아시아와 관련해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내용을 들여다 보면 거의 ‘계획’이지 그것이 어떻게 실행되었다는 소식은 좀체 접하기가 어렵다. ‘아시아’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많은 경우 ‘한국 교회의 주요한 역할’에 대해 말하고 이어 ‘복음화’와 ‘사제양성’ 등으로 이어진다. 아시아와 복음화를 연결한다면 무엇보다도 아시아 민중에게 기쁨과 행복한 것이 무엇이고 이를 위해 한국 교회가 어떤 구실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아시아, 작게는 아시아 교회가 처한 상황을 깊이 살피고 아시아 교회가 각자의 나라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도록 한국 교회가 지지하고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라고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아시아, 아시아교회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돌보아야 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절박한 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인적, 물적 자원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풍요롭고 그만큼 영향력이 있다는 말은 이미 많이 들어왔다. 동북아 평화를 시작으로 인종 및 종교 분쟁으로 얼룩진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이 자원을 효과적으로 쓴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의지이고 이를 관철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며 이 구조를 통해 실행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이 매번 개인의 단순한 공상으로 그치는 일은 참으로 답답하고도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