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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Church Renewal

교회문화 바꾸기 21 – 예언자가 사라진 교회: 다시, 변방을 위하여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예언자가 사라진 교회: 다시, 변방을 위하여 ‘ 평신도 희년’을 지낸다고 하는 소식을 어디선가 들은 듯싶더니 벌써 반년이나 흘러가 버렸다. 희년은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회당에서 감동적으로 읊은 이사야서의 ‘모든 이들의 해방’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2000년 대희년을 지냈던 한국 천주교회가 평신도 희년을 맞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당시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경갑룡 주교는 ‘한국 교회가 너무 외형적인 발전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복음 정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주교와 사제가 신원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 주교는 결국 문제는 주교들에게 있으며 주교들이 먼저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희년 때 다짐했던 ‘주교들의 깊은 반성과 새로 남’이라는 결의는 20여 년이 흐른 현 시점에서 볼 때 그냥 소비되는 말이었을 뿐, 어떤 구체적 계획과 그에 따른 실천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냥 소비되는 말’. 한국 교계가 평신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어구다. 평신도를 얘기할 때마다 뻔히 말로만 끝날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일이 수십 년 동안 반복되는 현실을 감내해 온 이들이야말로 산상설교에 나오는 복이 있는 이들이 아닌가. 굳은 신앙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상황을 그토록 오래 감내하고 있는 것일까. “사목위원들이 열심히 토론하고 조율해서 의견을 내놓으면 뭐 합니까. 본당 사제가 한마디로 ‘안 된다’고 하면 끝이지요. 평신도는 ‘보조’와 ‘협력’할 뿐이지 함께 의결하지 못한다고 교회법에 나와 있잖아요. 이미 다 아는 얘기인데 이런 걸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사목회장을 지냈다는 70대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말했다. 이어 한 여성 참가자는 “그러면 이런 포럼이나 심포지엄은 왜 하나요? 해 봐야 바뀌는 건 하나 없는데….” 이번 심포지엄 종합토론회 때 많은 이들이 공감의 박수를 보낸 질문이다.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 새천년복음화연구소는 지난 6월 9일에 ‘평신도 희년의 의미와 복음화의 미래’ 주제로 심포지엄을 공동 주최했다. 한 사제는 “한국 교회는 내적으로 자정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내부로부터가 아니라 지금 격변하고 있는 사회의 힘으로 바뀌게 될 것으로 본다. 서구 교회가 그리된 것 아닌가”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교회쇄신을 위해 활동해 온 이들에게는 뼈아픈 말일 수 있다. ‘그동안 뭐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70여 명의 참가자들의 분위기는 사뭇 희망적이었다. 단순한 불만이나 허탈함보다는 밝고 활기차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자리였다. 전쟁 종식과 한반도 평화라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데 대한 기대감과 희망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가 이 자리에서 이심전심으로 나눈 공분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누가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는 ‘교회법이 그렇다고 한다면 신도들이 교회법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하더라도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지도자 아래서 평신도를 보조자로 묶어 놓은 교회법을 바꾸자는 청원운동은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제안들이 나온 자리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간에 이 심포지엄은 교회 내 예언적 목소리가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성찰하게 하는 귀한 자리이기도 했다.   인천성모병원과 대구 희망원 사태를 겪으면서 교회쇄신과 개혁을 외쳐 온 이들은 이렇다 할 소리를 내지 못했다. 거꾸로 시민단체의 성명서를 통해 한국 교회가 어느 지경까지 왔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당황스러운 일들이 수년간 지속되어 옴을 목도하고 있다. 단지 이들의 수가 적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교회 안에서 예언자가 사라지거나 죽어 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인지도 모른다. 대외적으로 정의평화, 평등, 인권 등의 문제에서 목소리를 내 온 교회가 내부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이중적 태도는 이제 습관이 된 듯하다. 그러한 관성에 무감각해진 교회 내 진보진영은 ‘프란치스코 효과’니 ‘충격’이니 말들은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이를 체감하지도 또 제대로 응답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사회교리 주간’을 제정하고 ‘야전병원’이라는 새로운 교회 모델을 언급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그만큼 교회 내 진보진영의 목소리는 ‘연성화’되었다. 주교 선출, 공동의 의사결정 구조 확립, 주요 자리에 평신도 등용 같은 기초적인 교회의 합리화에 침묵하거나 ‘다양성’의 이름으로 오히려 위계를 변호하는 듯이 보인다. 지도력 결핍과 부패로 온갖 악취가 풍겨도, 전례문이 개악되어 신자들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어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탈중앙집중화나 탈로마화라는 ‘중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를 통해 권력을 지역교회로 이전하려는 숭고한 뜻은 한국과 아시아 교회의 지형에서는 지역교회의 권력을 성직자들이 독점함으로써 성직중심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 중심부로 진보적 평신도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합류하게 됨으로써 중심과 변방의 간극은 더 심화된다. 언젠가 마오쩌둥은 ‘진정한 사랑은 계급을 초월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이 주제는 TV 방송사들이 막장 드라마에 매일처럼 등장시키는 단골 메뉴다. 계급을 초월한 사랑이 불가능함을 어떻게 더 막장적으로 보여 줄까를 놓고 경쟁하지만 역으로 그것이 현실임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리얼하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중심부가 아니라 변방에 위치시키지 않고, 더 변방에 있는 이들의 눈물과 고통을 어루만지지 못한다면 마오쩌둥의 말을 넘어서기 어렵다. ‘갈릴래아에서 뭐 신통한 게 나오겠냐’는 성서 구절처럼, 온갖 굴욕과 모멸을 바닥깔개처럼 감내해야 하는 이 시대의 변방은, 거기서 울리는 예언자의 목소리는 가난한 예수의 것이며 우리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트럼프와 김정은 두 정상이 ‘세기의 회담’을 열고 이루어 낸 결과에서 보이듯 분명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교회의 변화가 이러한 외적 요인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변화를 교회 내부에서 수용하고 변용하여 발전적 방향으로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교회적 상상력과 경험, 전문성과 비전 등 주체적인 평신도의 역량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는 너무 멀리 나가 버린 교회를 되돌리겠다거나 수리해서 다시 잘 작동하게 하여 지난날의 명성을 되찾자는 ‘기능론적’ 또는 ‘승리주의적’ 관점과 구분되어야 한다. 작은 문제 하나하나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평신도들이 이러한 변화를 이끌 수 있으며 진정한 교회개혁의 실현을 준비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그동안 ‘교회문화 바꾸기’라는 제목 아래 교회쇄신과 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 독자와 나누고자 했다. 어설프고 설익은 글을 읽어 준 독자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음 달부터는 조금 더 다양하고 넓은 시각과 자유로운 주제로 찾아갈 것을 약속하면서 인사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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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20 – 더 이상 ‘빽도’는 없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더 이상 ‘빽도’는 없다 윷판을 놀아 본 사람들은 ‘빽도’에 걸려 다 이긴 게임을 놓쳐 버리는 낭패감을 맛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김정은과 문재인 남북 두 정상이 만나 보여 준 파격, 전쟁종식과 평화협정에 대한 희망이 북미대화, 4자대화로 이어져 연내에 평화협정으로 열매 맺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한반도 아니 동아시아 평화의 명운이 달린, 하늘이 준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생각하면 절로 ‘성령을 믿으며 주님의 부활을 믿나이다’는 기도가 더욱 절실해진다. 평화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염원에 응답하여 성령의 바람이 한반도를 부활하게 할 것으로 믿는다. 혹 여기에 미국이나 중국 또는 일본과의 정치적 관계가 걸림돌이 되어 ‘빽도’로 물러서기에는, 이 땅 한반도 민중이 70여 년간 흘려온 피맺힌 한이 너무도 참혹하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천명했다.” “긴 세월 동안 분단의 아픔과 서러움 속에서도 끝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이 자리에서 설 수 있었다.” 그렇다. 이제는 분단체제 아래서 한마디 말, 아니 숨소리까지도 ‘빨갱이 매카시즘’에 강탈당해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 온 모든 반동의 시대를 끝내고 이제는 전진만 있어야 한다. 통일운동의 금자탑 개성공단을 다시 복원하는 것에서 시작해 ‘남북 단일경제권’을 큰 그림으로 하는 수십 개의 ‘개성공단’을 만들어 경제적으로도 상호공존과 협력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평화의 날개를 달 때인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두 정상이 만나기 일주일 전 바티칸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조용히, 그러나 놀라움으로 세계를 강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21일 세 여성을 교황청 꾸리아 가운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교리성’ 자문위원에 임명했다. 교황청의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이를 “역사적 결정”이라고 불렀다. 과장이 아니다. 교황청의 9개 성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신앙교리성은 1542년 이단과 교파분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당시 바오로 3세 교황이 설치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신앙교리성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때 더욱 강력해져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 아시아 신학자, 여성 신학자들을 ‘심판’하는 구실을 톡톡히 해 왔다. 그런 신앙교리성이 이제 여성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500년의 남성 성직자 주도의 역사에서 일대 혁명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여성 전문가’라고 했다. 이번에 선임된 이들 가운데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7년에 ‘평신도 가정 생명부서’ 차관보로 임명한 린다 기소니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독일 튀빙겐에서 철학과 신학 학위를 받았고 그보다 1년 앞서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시 이탈리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철학 학위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미켈리나 테나체 교수는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교의신학과 인류학, 동방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과목을 가르친다. 또 다른 한 명인 레티시아 칼맹은 벨기에 출신으로 간호학을 전공했으며 로마의 교황청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비록 작은 변화라 하더라도 교황청의 최고 의결기관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점과 이 길로 계속 간다면 ‘제도화’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 퇴임 후에 ‘빽도’의 가능성이 예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사제 인사이동 때 자주 목격되는 전임자가 했던 일을 뒤바꾸어 놓는 것 같은 현상을 예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미 인구수에서 유럽의 가톨릭은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가톨릭에 주도적 자리를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의 줄기찬 개혁 의지에 다시 한번 찬사와 존경을 표하고자 한다. 이번 여성 자문위원 임명은 처음 여성사제 문제에 대해 ‘내가 누구라고 그것을 판단하는가?’라는 소극적이나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전향적인 입장에서 점차 후퇴해 온 것이 교황 자신의 입장보다는 바티칸 내부의 역관계, 곧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한다. 그가 2013년부터 추진해 온 평신도, 특히 여성의 교황청 고위직 등용은 성직주의와 나태한 관료주의에 대한 매서운 비판과 함께 했다. 그는 2014년 교황청 관리들에게 한 연설에서 위선적이고 자리만 탐내는 출세주의자들이 있다면서 이들은 “영적 치매”에 걸려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교황은 더 많은 평신도들, 특히 이들의 전문성으로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곳에는 성직자보다도 이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회에서 여성과 평신도의 역할을 확장시키고 다원적 문화를 고려해 교황청 여러 기구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도록 임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교회의 평신도는 세계 어느 교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헌신적인 신앙인이자 실천가다. 다만 이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열정과 신앙을 불태울 자리가 없다. 아니 자리를 주지 않는다. 석박사 학위가 있는 전문가는 물론이려니와 크고 작은 신학원 출신의 많은 평신도를 적재적소에 등용해 이들의 역할을 확장시킨다면 한국교회의 문화는 눈에 띄게 달라질 것이다. 말 그대로 사회의 누룩,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낼 것이다. 재정사정이 어려운 시골 본당은 빼더라도 신학적 소양이나 전문 교육을 받은 이들을 회계 일만 하는 ‘경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무장’(secretary general)으로 뽑아 그에 걸맞는 임금을 주고 활동하게 해 보라. 본당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 온몸을 불살라 투신하리라고 확신한다. 누누이 말했지만 당장 실천할 수 있다. 문제는 성직자들이 이런 데에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성직자들은 교황이 질타한 ‘영적 치매’라는 호통을 자신들에게 내리친 죽비라고 받아들이고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언제쯤이면 평신도의 말을 귀담아 듣는 날이 올지 미세먼지 잔뜩 낀 요즘 날씨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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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19 – 인사는 만사가 아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인사는 만사가 아니다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온 나라를 강타하고 권력이 구조화한 곳에서는 여지없이 ‘나도 말한다’며 고소 고발이 줄을 잇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가톨릭 교회에서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와중에 최근 두 교구에서는 사제의 정직 문제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도 회자되고 있으니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잘 알려진 탐사보도에 실컷 얻어 터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봄부터 술렁거림이 예사롭지 않다. 얼핏 보면 사제직을 잠시 그만두게 했다는 것은 ‘내부’ 문제이고 밖에서 왈가불가할 일이 아닐 것 같은데 파장이 교회 담을 넘어가는 것은 그만큼 사회와의 연관성이 크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 두 인사발령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슷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달라 보인다. 한 교구에서는 “교구 쇄신을 요청합니다”라는 제목으로 A4 14쪽 분량의 문건을 쓰고 이를 공개한 ‘내부고발자’에 대한 징계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한편 또 다른 교구에서는 해당 교구에서 운영하는 병원의 실세로 12년 동안 병원을 운영해 오면서 이 사제가 저지른 각종 불법영리행위, 배임, 세금 탈루의혹 등을 들어 정직으로 인사발령을 냈다가 얼마 뒤 아예 사제 옷을 벗겨 버리는 면직을 결정했다. 그동안 무수한 시민단체가 병원의 실질적 대표인 주교와의 면담을 요구해 왔음에도 전혀 반응이 없다가 언론에 회자되자 부랴부랴 정직 2달 만에 면직까지 일사천리로 치달았다. 과연 이 두 교구의 인사는 만사인가? 두 교구의 사안은 이렇게 다른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인사권자가 주교라는 점이다. 교구쇄신을 요청한 정은규 몬시뇰은 문건에서 어떻게 교구를 쇄신할 것인가에 대해 자세하고도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것에 못지않게,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현 대교구장의 리더십에 대한 신랄하고 통렬한 비판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정 몬시뇰은 “교구내 모든 문제들의 근원은 바로 대주교님의 영도력 부족이라는 사실”이라고 돌려 말함 없이 직접 조준했다. 이어 “주교의 영도력, 리더십은 인간적인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주교의 영성적 깊이, 도덕적 힘, 지적인 능력에서부터 출발하고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이 세 가지 근본 문제가 모든 지엽적인 문제의 근원지라고 비판했다. 그가 지적한 문제들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본 칼럼에서 논의한 교회쇄신의 내용과 비슷하므로 이미 매체들에 보도된 언론자료를 참고하라고 권한다. 다만 여기서는 앞서 말한 세 가지 근본문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하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정 몬시뇰은 “교구 곳곳에서 드러난 대주교님의 무능과 판단력 및 식별력 부족, 의사결정 능력의 결함과 그것들을 감추시려는 권위주의의 발로 및 대주교님의 성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고 보았다. 또 “교구에 수많은 비복음적 문제들이 있고, 인사쇄신을 요청했지만 거부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문건을 가지고 대주교와 면담까지 했으나 대교구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기사1)에 따르면, 정 몬시뇰은 면담 이후 대구 희망원사태 등을 처리하는 과정 등을 보며 대주교에게 쇄신 의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교구는 그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에 공지문을 내 입장을 밝혔다. 정직의 이유는 이렇다. “정직은 (그가) 4년 전 올린 진정서 때문만이 아니라 이번에 (정 몬시뇰이 그) 문건의 사실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발신인을 숨긴 채 여러 사람에게 유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위 기사 참조) 4년 전 올린 진정서는 앞서 말한 14쪽짜리 교구쇄신 요청문건(2014.04.23)을 말한다. 내가 이탤릭체로 강조한 ‘진정서 때문만이 아니라’는 대교구가 이 ‘문건이 사실이 아닌 허위’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며 이를 유포해 “교구 안팎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원인”과 더불어 정직의 근거로 삼고 있다고 보인다. 인천성모병원은 시민단체에 ‘환영’을 받기까지 한 점에서 정 몬시뇰 경우와는 달라 보인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노조로 줄임)은 지난 2월 23일 “박문서 신부의 신부직을 박탈하는 면직 처분은 사필귀정”이라는 제목의 논평문을 내고 “이를 적극 환영한다”고 밝혔다. 논평문이 지적한 주요 문제를 짚어 보면 이렇다. 국제성모병원과 인천성모병원의 부원장이었던 박문서 신부는 위법적 환자유치활동, 업무시간 외 병원홍보활동 등 공격적인 돈벌이 경영 추구, 그 과정에서 건강보험 부당청구 의혹, 또 ‘엠에스피'(MSP)라는 개인회사를 만들어 병원과 부당한 내부거래를 한 의혹, 뿐만 아니라 갖가지 형태의 ‘갑질경영’ 또 이를 문제삼는 노조에 대한 활동 방해 및 탈퇴 강요, 집단괴롭힘과 강제 해고 등 각종 노조탄압과 부당노동행위를 주도해 왔다.2) 문제를 적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보건노조는 “국제성모병원과 인천성모병원의 비정상적인 문제 해결 없이 박문서 신부의 신부직을 박탈하는 면직 조치로 그친다면 꼬리 자르기가 되고 만다”고 지적했다. 박 신부의 면직은 인천성모병원 정상화의 시작점이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당연하며 옳은 지적이다. 이어 “인천교구와 인천성모병원, 국제성모병원이 박문서 신부의 적폐를 청산하고 비정상을 정상화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착수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정직에서 면직까지 2달이 채 안 되는 짧다면 짧은 시간에 그러한 판단을 한 주교의 판단력은 대구대교구와는 얼핏 달라 보인다. 그러나 지난 4년여 동안 보건노조를 비롯한 많은 시민단체들이 사태 해결을 위해 인천교구장과의 대화를 요청해 왔지만 ‘모르쇠’와 침묵, 심지어 보건노조를 고발까지 했다가 취하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리더로서의 자격이 없는 인사권자의 인사는 만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그 리더를 정할 때 다수인 평신도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데에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공동합의성’(synodality), 곧 교회의 민주화와 합리화가 시급히 실현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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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18 – 성직주의와 평신도의 해방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지난해를 마감하는 칼럼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로 한 해를 정리할 수 있었음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함을 표했다. 관성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천주교, 개신교, 불교의 종교개혁을 염원하는 이들이 힘을 합쳐 연말에 개혁선언문을 선포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잉크가 채 마를 사이도 없다고 했던가. 한 달도 안 되어 이를 여지없이 깨 버리는 일이 생기고 말았으니 새해부터 낭패감이 크다. 지난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구 희망원 사태’와 관련해 실형을 선고받은 한 사제가 1월 16일 교구인사에서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2008-11년 희망원 총원장이던 그는 ‘(법적 근거가 없는) 내부규칙을 어긴 생활인을 직원들이 심리안정실에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중단시키지 않아 92명을 감금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10월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이번 인사는 교회가 희망원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기에 교회 안팎으로 파장을 불러오기에 충분할 만큼 심대하다고 여겨진다. ‘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및 비리척결 대책위원회’(대책위로 줄임)는 1월 18일 ‘희망원 인권유린, 비리 주범을 복권시킨 천주교대구대교구의 1월 16일 사제인사를 규탄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하 <가톨릭프레스> 2018.01.18. ‘[전문] 천주교대구대교구의 사제인사를 규탄한다!’ 참조) 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희망원 사태에 책임있는 사제를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낸 교회를 비판했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마치 그가 종교를 위해 순교한 듯 떳떳해 하는 기현상에 의문을 표하며, 교회의 도덕적 기준이나 법적 기준은 왜 사회의 기준과 다르고 그것에 못 미치는 처분을 내리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제정일치 사회도 아니고 더욱이 피해자들이 교회 위탁운영이라고는 하지만 ‘세속’의 사회복지기관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교회가 왜 또 어떻게 범법자를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은 채 곧바로 복권시켰는가에 대해 시민단체의 이 같은 의문과 질책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대책위는 ‘내부의 통렬한 반성과 자성이 없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하면서 “반성이 없는 교회, 비상식적인 교회, 지역민들의 기대와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종교는 스스로 혼란에 빠져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시민사회가 교회의 인사와 관련해 성명을 발표했다는 거의 전무후무한 사실과 1980년대에나 잘 어울릴 법한 ‘규탄한다’는 표현이 독재정권이나 정부가 아니라 교회를 향하고 있음이다. 이는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어느새 공공연한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잘못을 저지르고도 통렬한 반성이 없는 교회가 과연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근본 물음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인다. 교회는 그가 석방되었다고 해서 죄가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집행유예’라는 말 그대로 일정한 기간 동안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법리를 더 깊이 숙고했어야 했다. 사실 대책위가 제기한 ‘왜 교회는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나 책임에 반하는 처분을 내리는가’라는 의문은 상식이 있는 신자라면 얼핏 수긍이 가지 않는 처사로 볼 법하다. 어쩌면 이 질문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 ‘사랑의 기쁨’에서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성직자중심주의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지난 12월 15일, 호주 왕립 아동성학대 조사위원회는 조사보고서를 내고 교회 안에서 일어난 아동성학대 범죄를 처리하는 교회의 태도 안에 이 ‘성직자중심주의’가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했다. 비록 사안은 다르지만, 이 보고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사건에 교회가 왜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대처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호주 성학대조사위, ‘의무독신제와 고해비밀 바꾸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7.12.19.) 보고서에 따르면, 성직자중심주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래야 마땅하다는 의식, 우월감, 예외 의식, 권력 남용 등과 연계돼 있으며, 또한 교회가 세상과는 다르다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았고 급기야 아동 성학대도 교회 안에서 비밀로 처리할 문제로 치부하게 된다. 이어 보고서는 신학적 왜곡을 지적한다. “사제는 서품될 때 ‘존재론적 변화’를 겪는다는, 즉 그는 평범한 인간과 다르며 (한번 사제가 되면) 영원히 사제라는 신학 관념은 성직자중심주의 문화의 위험한 구성요소다. 사제는 성스러운 인물이라는 관념은 통제되지 않은 권력과 신뢰를 과장된 수준까지 이르게 만들었으며, 아동 성학대 범인들은 이를 악용할 수 있었다.” 성직주의를 부추기는 신학은 사제와 평신도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차별을 정당화하며 집행유예인 사제를 사목자로 복권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일은 이번 인사에 앞서 지난해 12월 한 본당 대림 특강에서 바로 이 사제가 신자들에게 반성과 용서, 화해, 사랑 같은 말을 설교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는 기관에서 많은 노숙자와 장애인들이 학대를 당했는데도, 이를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신자들에게 떳떳하게 강의를 할 수 있는 용기와 자격은 누가 준 것인가?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범법자를 사목자로 파견해도, 교회의 결정이니 무조건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는 평신도를 능멸하는 것을 넘어 신성을 모독한 행위다. 우리가 잘 알 듯이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다. 인간 안에 신성이 가장 온전히 그리고 남김 없이 드러난 예수의 성전에서 평신도를 능멸함으로써 그 관계를 파괴했다. ‘평신도 희년’을 선포한 마당에 평신도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그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예수시대에도 이런 신성모독은 매우 드문 것이지 않았을까. 진실로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정녕 하늘이 무섭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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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17 – 교회개혁과 평신도 희년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이제 며칠 뒤면 새해를 맞는다. ‘2017’이라는 숫자가 친근해질 만하니까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올해 마지막을 낙담과 절망보다 ‘희망’이라는 말을 꺼내어 마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요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2월 28일 천주교, 개신교, 불교에서 그동안 ‘각개전투’해 오던 ‘종교개혁’ 세력이 한자리에 모여 각 종단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면서 세 종교가 개혁선언문을 선포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한 것이 그것이다. 세 종단 대표들은 선언문 선포 기자회견 전인 12월 22일 ‘시민공청회’를 열어 이런 행위가 종교끼리만 하는 행사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사회의 일부로서 종교의 쇄신과 개혁에 비판과 지지를 청하기도 했다. 언론에 많이 회자되어 잘 알려진 대로 올해는 유난히 교회운영 기관에서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다. 대구 희망원을 비롯해 수많은 가톨릭과 관련된 대형 사건이 터졌고 며칠 전 말 많던 인천성모병원과 인천국제성모병원의 실세인 부원장 신부가 여러 회사를 설립하고 두 병원과 ‘부당한 내부 거래’한 사실이 탐사보도 매체인 <뉴스타파>와 JTBC 등의 보도망에 걸려들었다. 그동안 ‘모르쇠’로 일관하던 인천교구는 보도가 나간 뒤 20여 일 만에 부원장과 원장을 ‘휴양’과 ‘은퇴’라는 형식으로 전격 교체했다. 이번에도 인천교구는 이 인사의 이유나 취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사제가 죽는 경우에도 왜 죽었는지조차 밝히지 않는 교회의 ‘비밀주의’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비밀주의나 침묵이 문제를 더 키운다. ‘인천성모, 국제성모병원 정상화 인천시민대책위원회’는 26일 보도자료에서 “그동안 언론을 통해 각종 비리와 불법에 연루의혹이 제기된 박문서 신부의 불법, 부당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이나 관련자에 대한 처벌, 이에 대한 공식사과, 재발방지대책 등의 입장표명 없이 보직을 해임한 것은 이번 인사발령으로 사건의 꼬리를 자르고 적당히 무마해 사건이 더 커지는 것을 막아 보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래서였을까. 종교개혁 선언문에서 천주교 측은 이 문제를 개혁해야 할 대상 1순위로 꼽았다. “교회는 대형의료 시설과 사회복지 시설을 통한 자본증식 활동에 사목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이윤 추구 사업에서 물러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가난한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교회가 학교와 병원은 물론이고 2004년 서울대교구가 주식회사 ‘평화드림’을 만든 이래 인천교구 같은 다른 교구에서도 이를 본떠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뛰어들면서 전체 교회가 배금주의, 상업주의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한다. 그러니 ‘가난한 교회’라는 말은 꺼내기가 부끄러운, 아니 교회의 모순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터부’처럼 여겨질 법도 한데, 여전히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한 선언문은 ‘평신도 희년’을 계기로 성직자 중심의 교회 운영을 멈추라고 요구하면서, 여성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 형제자매로 교회 운영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여성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성직자 및 남성 평신도와 더불어 동등한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진정한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성직주의와 남성중심주의적 교회문화를 쇄신하고 변화하는 데 있어 여성문제가 중심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본 칼럼에서 ‘교회문화 바꾸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다뤄 온 내용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인다. 나아가 선언문은 “인간의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해고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연대해 온 만큼, 같은 기준으로 교회도 돌아보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기서 다시 대구대교구가 운영하는 대형병원의 예를 들어 본다. <대구 MBC>가 방송한 내용은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고 있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임신한 간호사에게 야근 강요..유산까지”라는 제목으로 나간 방송보도에 따르면, 대구 가톨릭대학병원에서 임신한 간호사들이 법으로 금지된 야간 근무나 초과 근무를 강요받아 왔고, 일부는 유산까지 한 사실을 세 명의 간호사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2017.12.27) <대구 MBC>는 하루 전날인 12월 26일에 보도된 방송에서 이 대학병원 간호사들이 병원 외부행사뿐만 아니라 자체 송년회나 새로 들어온 의사 환영회에까지 장기자랑 ‘도우미’로 동원됐다면서, 간호사들이 행사장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선정적인 춤을 추는 장면을 내보냈다. 이들은 큰 행사를 앞두고는 한 달 전부터 쉬는 시간을 쪼개 연습하면서도 연습장소와 식사비용까지도 각자가 부담했다고 증언했다. 병원 측은 간호사들의 자발적 참여라고 해명했다지만, 이런 일 외에도 병원 청소나 이삿짐 나르기, 외부 인사 안내 등을 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되면서 논란이 더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정도면 교회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연대해 왔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같은 기준으로 교회도 돌아보라’라는 주문 또한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라고 보인다. 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해 보인다. 지난 10월 16일 올해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는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평협)의 요청에 응답해 ‘평신도 희년’으로 지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교회는 오는 1월에 한국 평협의 새 회장을 뽑기 때문에 작게나마 평신도 희년의 실현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코앞에 두고 있다. 선출이 아니라 또 다시 ‘위에서 낙점해서 내려 보내는’ 낙하산 인사로 회장단이 정해진다면 이미 ‘희년’은 또 한 번의 말장난이요 성직주의의 기만에 다름 아닐 것이다. 평신도 희년과 교회개혁은 평신도 스스로가 살아 계신 성령을 믿으며 그 안에 전적으로 투신할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아가 하나가 아니라 세 종교가 함께 하는 종교개혁은 2018년을 희망의 해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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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16 – 토론과 공론이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자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지난 10월 31일, 루터가 교황청의 부패에 맞서 비텐부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된 바로 그날, 우리신학연구소는 남녀 수도회 기구와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500년이라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교회개혁과 관련해 변화가 절실한 상황이어서 교회일치를 주제로 신학적 토론을 하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부제인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는 죄를 짓고 난 뒤 아담과 카인에게 그러했듯이 ‘한국 천주교회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하느님의 준엄한 물음으로, 또 이에 대해 한국 교회가 어떤 응답을 해야 하는지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심포지엄은 꽃동네를 비롯해, 인천 성모병원, 대구 희망원, 성가정 입양원, 대구 파티마병원, 청주 사제 폭행사건, 충주 성심맹아원, 유치원장수녀 원생 폭행사건 등 교회가 운영하는 시설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단발성의 우발적인 것도 있겠지만, 수용인들의 인권유린과 부정부패가 얽히고설킨 결과의 산물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루터가 교회개혁이라는 횃불을 치켜든 지 500년이 지났지만 2017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쇄신과 개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것이어서 ‘교회일치’라는 말로 피해갈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 이번 심포지엄의 배경이 되었다. 이미 내정된 발표자를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외압과 우여곡절에도 심포지엄에서는 “수용소가 존재하는 한 복음의 기쁨은 없다”며 교회가 먼저 나서서 ‘탈시설’에 앞장서 ‘수용인’들이 집단수용시설에 격리 수용시키지 말고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자는 직접적이고도 올곧은 제안을 내놓았다. 이는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법인의 90퍼센트가 종교계이고 또 대구 희망원 인권유린 사건도 이런 시설수용의 문제로 지적돼 왔기에 ‘경영’이 아니라 윤리적 측면에서 태도의 전환이라는 근본적인 요구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과 제안이 처음은 아니다. ‘꽃동네’ 시절로 올라가면 이미 수십년이나 묵은 얘기다. 한국에 장애인 그룹홈 개념을 처음으로 들여와 지금까지 실천해 온 천노엘 신부 같은 이들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여지없이 파묻혀 버렸고 지금도 공명 없는 메아리로만 떠돌고 있다. 또 서소문과 천진암 같은 성지, 성역화 사업이 배태하고 있는 교회의 몰역사적 처사나 배타성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진정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용서와 화해를 구하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이런 비윤리적 사태가 교회의 이름으로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교회의 최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평신도들이 철저히 소외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것의 대안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안한 대로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나누고 합리적 토론을 거쳐 결정하는 ‘공동합의성’에 바탕한 교회, 곧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안한 ‘친교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교황은 성 요한 크리스토모의 말을 빌어 바로 이것이 시노드이고 ‘시노드가 교회’라면서 2018년에는 청년에 관한 시노드를, 그 이듬해에는 아마존 지역의 토착민과 생태계 파괴와 관련한 범 아마존 지역 시노드를 개최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열린 장에서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시노드가 바로 교회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공동합의성은 단지 몇 명이 제한된 공간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그것이 모든 이,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논의하고 채택하는 과정을 말함에 다름 아니라고 보인다. 얼마 전 주교회의에서는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과 관련된 공론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서는 4대강을 예로 들면서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계, 학계 인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나 합의를 생략하고 전문가에게 맡기라며 합당한 법과 절차도 무시한 채 추진했다가 현 상황처럼 4대강 유역의 생태계 파괴로 결과 됐다고 비판했다. 1장 분량의 성명서에 ‘(소수) 전문가’라는 단어가 9회나 등장하는데 이는 전문가에 대한 불신을 지적할 목적보다는 국민의 생각이나 합의과정이 생략된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읽힌다. 성명서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국가가 전문가들의 견해와 분석을 충분히 존중하고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제한된 전문가 집단이 모든 결정을 좌우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국민 다수의 기본 인권과 생명권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국민들 스스로가 어떤 형태로든 관심을 갖고 사태의 진상을 포괄적으로 인식하고 식별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미래세대까지 포함한 국민 모두의 공동선을 위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부는 모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의 선택을 정책에 반영하고 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 정부는 국민의 주인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 인용문은 우리가 위에서 논의해 온 공동합의성 또는 공론화 문제의 핵심을 간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고 보인다. 여기서 ‘국가’를 ‘교회(계)’로, ‘국민’을 ‘평신도’로 바꾸어 지금 당장 읽어 보시라. 교회 당국은 교회 밖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해 평신도의 올바른 판단을 돕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 존중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핵문제’니까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논의한 주제 역시 생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론화의 필요성이 부정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데 앞서 벌어진 사태나 또 다른 주제로든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 토론하는 공론장이나 공론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최근 터져 나오는 여러 사건들로 미루어 보건대 앞으로는 이러한 ‘이중 기준’은 통할 것 같지 않다. ‘정부가 국민의 주인이 아니다’고 옳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 당국이 평신도를 대상화시키고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이 대목에서 심각히 성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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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역할 제한하는 교회법 고치자”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교회의 개혁 2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남장협),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여장연), 우리신학연구소는 10월 3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교회의 개혁’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이 내용을 2회에 걸쳐 싣습니다. “평신도는 자문만 할 수 있도록 한 교회법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어긋난다. 법 개정 청원운동을 해야 한다.” “교회법 개정보다 사제들의 인식을 바꾸는 게 쉬울 수 있다.” 천주교 수도회와 연구소가 함께 마련한 종교개혁 500주년 세미나 후반부에서는 성직자 중심의 한국 천주교의 현황과 대안을 두고 토론했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바오로)은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 ‘공동합의성’을 돌아보다’를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대구 희망원, 파티마병원, 충주성심맹아원 등 천주교가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어느 교구에서도 교구장이 피해자나 문제를 제기한 시민단체들과 대화에 나섰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며 이를 “리더십 부재”로 봤다. 황 소장은 “한국 천주교회의 개혁은 리더십 부재를 극복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며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하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지도자 선출제도의 도입과 확립”을 요구했다. 그는 특히 “주교선출제”를 강조했다. “사목회가 최종 의사결정기구 돼야” 또한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공동합의성(synodality)’에 따라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황 소장은 이러한 제안이 원칙적, 신학적으로 맞는 말이더라도 “현실 교회법과 충돌한다”며, 법 개정 청원운동에 나서자고 말했다. 그는 현재 교회법에 따르면 사목평의회, 본당 재무평의회 등에서 평신도는 “건의”하고 주임사제를 “보필”할 수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세미나 참석자들과의 토론에서 황 소장은 “단지 자문이 아니라, 사목평의회가 본당에서의 최종 의사결정기구가 되어야 한다”면서, 신자들이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이 주임신부 뜻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많은 것을 비판했다. 천주교 성당에 설치되는 본당 사목평의회(사목회)는 본당 공동체의 모든 일을 심의, 평가, 추진하는 일을 하지만, 주임사제의 “자문기구”다. 많은 본당에서 사목회장은 신자들의 자문을 받아 주임사제가 ‘임명’하고 있다. 또한 전통적으로 한국교회에 있어 온 “사목회장”은 교회법에는 근거가 없다. 주교회의가 낸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175조에는 사목평의회 의장은 ‘사목회장’이 아니라 본당 주임사제다. 본당 주임이 회의를 “주재”한다는 교회법 536조에 따른 것이다. ‘본당 사목평의회 회장 직선제’가 한국 천주교 평신도의 성숙에 비춰 볼 때 준비가 되었느냐는 토론도 있었다. 이에 대해 황 소장은 “평신도의 성숙을 말하려면 교육을 말해야 한다”며 “본당, 교구에 너무도 다양한 교육이 있지만 지속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60-70대에게 청소년기의 교리를 가르칠 수는 없다”며 생애주기에 맞는 교육을 강조하는 한편, “오직 미사”만 많은 한국 천주교의 분위기가 신자들의 토론 문화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김선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후 연구원(베드로)은 “교회법 개정도 중요하지만, 신학교 교육을 바꾸는 게 교회 개혁에 더 절박하다”고 말했다. 그는 “신학생끼리만 어울려 공부하고 토론”하고, 본당에서 “학사님”으로 불려서는 “평신도와 동등한 토론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전국의 신학교를 통합해 종합대학으로 만들고, 신학생이 “다른 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수업 듣고 토론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천주교, 공의회 정신을 입맛대로 수용” 김 연구원은 ‘교회의 역사인식, 배타성을 돌아보다’를 주제로 발표하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외치던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 내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며 이를 “교회쇄신 없는, 모순된 공의회 수용”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천주교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세상 속 교회’ 정신에 따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지만, ‘하느님 백성’이라는 공의회의 또 다른 교회론에 관심이 많았던 비판적 신자들은 매몰차게 내몰았다는 이야기다. 김 연구원은 “특히 1987년 이후 몇 년간 교회 지도부는 교회 권력구조에 비판적 목소리를 제기하던 단체와 구성원들의 활동을 통제했다”며 “87년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활짝 꽃폈던 것과는 사뭇 대조되는 상황들이 연출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이 ‘나는 과거에도 옳았고 지금도 옳다. 하지만 너는 틀렸다’는 “뿌리 깊은 배타성”과 관련됐다며, “교회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보다 야만적 사회, 군부독재,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이 더 편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 천주교가 “교회 안의 야만성을 돌아봐야 한다”면서, 지금처럼 교회의 문제를 감추기에만 급급하다가 그동안 쌓은 사회적 신뢰마저 잃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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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 권위주의적 구조와 소통 2 : “주교님 제발 소통 좀 합시다!”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인천성모병원, 대구 희망원, 성가정입양원, 대구 파티마병원, 청주 사제 폭행사건, 충주성심맹아원 등 교회시설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며, 요즘은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이 드러내는 것조차 부끄럽고 죄스럽기만 하다…. 교회로 인해 상처받고 억울해 하는 사람들의 하소연에도 귀기울여 주시고 소통해 달라”(“김은순 씨의 1인 시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7. 08. 31.) 전 청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김은순 씨가 청주교구장 주교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는 현재 세월호 충북대책위원, 핵없는 사회를 위한 충북행동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교회 안팎에서 정의평화, 인권 활동을 활발하게 해 오고 있다. 이번에는 그의 공동선을 위한 관심과 비판이 교회를 향하는 듯하다. 그는 지난 8월 25일부터 청주교구청 앞에서 대형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해 왔다. 피켓에는 청주교구가 운영하는 충주성심맹아원에서 2012년 11월 8일 “11살 김주희 양이 학대, 구타, 타살의 흔적을 남기고 죽었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며 “장애인 인권 보장,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원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지금여기>에 따르면 청주교구에 김은순 씨의 요구에 대한 입장을 물었지만 답변이 없었고, 교구청 한 관계자에게서 현재 교구는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만 들었다고 전했다. 김 씨는 교구장 주교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배상하여 그 실수를 통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소통”하는 “성숙한 교회의 모습”을 요구했다. 최근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사업장과 관련한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이 대중매체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김 씨의 경우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사실 그가 요구하는 소통과 대화는 청주교구 산하 ‘충주성심맹아원 김주희 양 사망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편지에서 보듯이 그가 열거한 사건들은 대구, 인천, 청주 등 여러 교구에서 일어난 것이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대구 희망원; 2016. 10. 09, 충주맹아원; 2017. 08. 12.)라는 잘 알려진 탐사보도방송에도 나올 만큼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교구에서도 교구장이 피해자나 문제를 제기한 시민단체들과 대화에 나섰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어떤 이유이건 간에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대화나 소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이나 의지가 없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노조와 시민사회에서 교구장과의 소통과 대화를 몇 년째 요구해 오고 있는 인천성모병원은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2014년 7월 인천성모병원은 노조지부장을 국제성모병원의 의료급여 부당청구를 제보한 것으로 지목해 압박했고, 이 일은 노조탄압 문제로 이어져 노조와 병원, 인천교구 간의 갈등으로 불거졌다. 그 과정에서 지부장은 병원관리자들의 ‘괴롭힘’에 실신했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까지 했으며, 결국 법원에 ‘집단괴롭힘’ 소송을 냈다. 법원은 2017년 1월 노조지부장에 대한 병원관리자들의 ‘집단괴롭힘’ 혐의를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은 노조지부장에 대한 집단괴롭힘이 ‘상부 지시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위법행위’라며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이사장(염수정 추기경)과 병원장(이학노 신부), 또 괴롭힘에 연관된 병원관계자 2명에게 책임을 물어 99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인천성모병원 노조탄압 집단 괴롭힘, 유죄 판결”, <가톨릭 프레스> 2017. 01. 24.) <가톨릭 프레스>에 따르면, 이 일이 있기 전 노조와 시민대책위는 인천교구 답동주교좌 성당 입구에서 단식 농성, 병원 앞 1인 시위, 촛불 집회, 바티칸 원정 투쟁 등을 하고, 수차례 대화를 요구했지만 교구는 이에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그해 5월에 대법원은 병원 측이 ‘성모병원 시민대책위’ 대표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한 것에 대해 무죄를 판결했다. 시민단체들은 병원 측이 무리한 법정소송으로 성모병원 사태를 무마하려는 꼼수가 철퇴를 맞았다며, 병원운영주체인 인천교구가 사태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임 교구장도 아직 시민사회나 노조와의 대화나 소통을 위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뭐가 그리 어려운 것일까?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친교의 공동체’로서 그 안에서는 누구나가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평등한 공동체’라고, 그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이라고 배웠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이론과 실제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주교와 만나기가 어려워진 것일까? 한국 천주교회가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한 것은 오랜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1980년대 주교회의가 교회 내 사회운동 단체를 대한 태도에서 결정적이고 여실하게 드러난다. 1987년 춘계 주교회의 총회에서는 한국천주교평신도 사도직협의회와 한국가톨릭농민회의 회칙 승인의 취소 및 잠정적 활동정지를 명령하고 또 전국 가톨릭대학생총연맹에 대해서는 주교회의가 인정한 바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교회 내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사회운동 조직과 ‘비공인’ 단체를 거의 ‘무장해제’ 수준으로 몰아갔다. 이어 같은 해 추계 총회에서는 평신도 중심체제로 운영되어 온 정의평화위원회 대표를 주교로 바꾸고, 평신도가 맡아 왔던 사무국장을 사제로 전격 교체했다. 1987년 한국판 ‘피플 파워’라 할 수 있는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등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를 축하하고 있을 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흐름과는 정반대로 권위주의적 체제가 재정비되어 마치 견고한 요새처럼 소통과는 거리가 먼 체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천주교회”,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8, 330-348) 아마도 그 뒤부터 이 ‘소통 장벽’이 지극히 높아진 듯하다. 평신도 개인 또는 단체가 급박한 사정으로 주교를 만나거나 소통해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총무 사제를 거쳐야 하는 관료주의적 ‘절차’를 밟아야 했고, 그 과정은 마치 봉건시대 영주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대로 ‘양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목자이기 위해서는 이런 권위적 구조에 기대어 대화와 소통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대화와 소통에 나서는 자비로운 지도자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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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화 바꾸기 – 권위주의적 구조와 소통 1 : ‘대화’와 ‘합의’의 부활

[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물론 희망을 말한 것이지 현재 교회에서 대화, 소통, 합의라는 말이 온전한 의미대로 실현되거나 되살아났다는 뜻은 아니다. ‘죽음보다 강한 희망’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버릴 수 없는 덕목이니 언젠가는 실현되리라고 꿈꾸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부활’이라고 하면 이미 죽음을 전제하는데,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서 이런 민주적 요소인 대화와 합의는 언제 죽었다는 말인가. 굳이 시점을 잡아 본다면 아마도 한국 교회에서는 초기 새 세상을 대망하며 천진암에 모여 강학회를 열고, 열심히 배우고 믿으면서 그것을 전하려 애썼던 초기교회 60여 년 바로 그 뒤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천주교회에서 대화와 합의의 정신은 조선시대 봉건질서 속에서 ‘평등을 꿈꾸는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초기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고 이들이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나누어 놓았다고 보면 그 생명이 길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아니 그래도 우리에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있지 않은가. 공의회의 대표적 정신이 세상과의 소통과 대화였으니 그것의 부활은 공의회를 시점으로 잡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얼마나 공의회가 이 ‘대화’의 정신에 충실했는지 문서를 뒤적이는 일은 일단 접자. 다만 한 가지, 지역주교단의 권한과 협력을 강조하는 ‘단체성’(collegiality)을 크게 부각하여 바티칸의 중세적 중앙집권적 모습을 탈피하고 지역 교회에 자율성을 주고자 했다는 점에서, 개혁적, 예언자적 행위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단체성이 햇빛을 보기 위해서는 교황 바오로 6세 이후 먼지에 파묻힌 채 40여 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아시아의 경우, 공의회의 대화 정신에 힘입어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 불교, 유교, 힌두교 등 대 종교 전통과의 대화, 또 다양하다는 말조차도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다원적인 문화와의 대화라는 ‘삼중 대화’를 정식화하는 데에 영감을 주었고, 나아가 ‘참여 교회’라는 교회론으로 또 ‘소공동체 운동’이라는 사목적 실천으로 구체화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시아 교회의 삼중대화와 소공동체에 있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역교회가 아니라 여전히 상명하달의 수직적 관계가 그대로인 채, 대화와 합리성이 실종된 성직자 중심의 교계라는 점은 그러나 성령은 정녕 불고 싶은 대로 부는가 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처음부터 탈중앙집권화, 분권화를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하며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다. 최근에는 전례에 쓰이는 문서를 라틴어에서 현지 언어로 옮기는 문제와 관련해 책임의 대부분을 교황청에서 각 나라 주교회의에 넘긴다는 자의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9월 9일 ‘큰 원칙’이라는 자의교서에서 “전례가 사람들에게 더욱 잘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요청이 더욱 명확히 재확인되고 실천되도록 교회법을 바꾼다”(<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2017.9.11.)고 밝혔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교회법 838조 2항에서 교황청이 전례서의 각국 번역판을 감독해 인준한다는 내용과 3항에서 각국 주교회의는 교황청의 사전인준을 받고 출판하라는 내용의 두 조항을 ‘각 지역 주교회의가 승인한 라틴어 전례문의 번역판을 교황청이 인준한다’라고 간략히 바꾼 것이다. 그러니까 각국 주교회의에서 번역상의 문제가 없다고 ‘오케이’하면 바티칸에서는 다른 까다로운 절차 없이 승인하겠다는 뜻으로, 그 책임을 각국 주교회의, 곧 지역교회에 넘겼음을 뜻하는 것이다. 2001년 개악된 이후 15년여의 혼란과 갈등이 있고 난 다음이어서 더욱 값지다. 2001년 경신성사성은 훈령을 내고 라틴어 번역은 “그 내용을 하나도 빠트리거나 더함이 없이, 가장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성, 속을 엄격히 나누고 거룩함을 라틴어에서만 찾는 성직자나 신학자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1969년 공의회 정신이 서슬퍼렇게 살아 있을 때 경신성사성이 라틴어 번역을 각 나라의 언어와 문화 여건에 맞게 번역하도록 권고한 번역지침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공의회 정신에 어굿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 경신성사성은 교황청이 인준권한이 있지만 주요 책임은 지역 교회에 있음을 확인해 준 것으로, 2001년 훈령은 그 방향을 거꾸로 되돌린 과거로의 회귀였기 때문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에둘러 지적한 것처럼, 이 2001년 훈령은 아무리 원본에 가까운 번역이라 하더라도 소수의 신학자, 소수의 사제, 소수의 성직자를 위한 것만으로 여기에 ‘하느님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에 대한 배려나 이들의 신앙감각은 들어설 틈이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례요 신학이란 말인가. 두 가지만 말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법에 지나치게 기대지 말라며 자비로운 교회상을 강조해 왔다. 평소 신념대로 프란치스코는 교회법을 뜯어고쳤다. (교회)법은 소수 성직자나 신학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 줬다. 교회법을 바꾼 것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을 향한 것임을 교계 지도자들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둘째는 이번 교회법 수정은 지역교회의 권한의 확대라는 분권화를 상징한다는 점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도널드 트로트만 주교는 “이번 교회법 개정은 지역교회 주교단의 단체성의 승리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의 승리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미국에는 2001년 훈령에 따라 2011년에 미사경본을 수정함으로써 이미 수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었기 때문에 또 다시 미사경본을 바꾸기에는 예상되는 혼란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잃은 길을 되찾았으니 좀 쉬었다가 가는, 이를테면 시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어떠한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어긋나는 2001년 훈령에 따라 바꾼 미사경본을 (이번 대림 제1주일부터) 쓴다고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법이 바뀌었으니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겠다. 하나는 차제에 ‘하느님의 백성’과의 어떤 대화나 소통 없이, 공청회 한 번 열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소수의 성직자, 소수의 신학자’들이 모여 결정한 ‘절차의 문제’를 반성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의견이 반영되어 이들의 신앙감각이 표현되고 성장하는 방향을 모색하는 전향적인 태도다. 다른 하나는 이번 교황의 교회법 개정을 지역교회 전체가 아니라 ‘주교 권한의 확대’로만 좁혀 해석해 ‘아무 문제없다’고 보는 시각일 것이다. 후자는 매우 우려스럽다. 이 문제는 미사 경본을 바꾼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저토록 곡진한 교황의 교회개혁의 구체적 실행이, 탈중앙집권화가, 한국교회에서는 개혁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와 성직주의가 고착화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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